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영향과 결론 == [[https://img-9gag-fun.9cache.com/photo/arMLBxd_460s.jpg]] 파스샹달 전투 전후 사진 마을 하나가 그냥 증발됨을 볼 수 있다. 파스샹달 전투는 [[동부전선]]에 치중하던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제 더 이상 독일군에게 또 하나의 [[베르됭 전투|베르됭 공세]]를 전개할 여유도 없었으며,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슈망데담 근처에서 10월 23일 공세를 실시하여 5km 정도의 진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이프르에서 99일 동안 영국군이 많은 노력을 쏟은 것과 대등한 성과였다. 영국의 역사가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Edward_Edmonds|제임스 에드먼즈]]는 파스샹달 전투를 끊임없이 재개한 헤이그를 두둔했다. 이프르 전선에 88개의 독일군 사단을 묶어두었고, 공세에 나선 연합군 사단은 6개의 프랑스 사단과 영국군과 자치령 사단 43개 사단이라는 것이 그 논지다. 문제는 이프르 사단에 있던 독일군은 당시 전체 독일군의 1/3수준에 불과했고 헤이그의 사단은 그 절반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합군의 연이은 공세로 전쟁 초와 다르게 적정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농장과 공장에서 병적에 오를 인원들을 모조리 올렸음에도 그 수가 부족하여 병자(새우등, 근시, 발육부진, 오목가슴)와 약자, 노령자들을 신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스샹달 전투로 청년들은 더욱더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파스샹달 전투 이후 영국군 사단 편재는 기존 12개 보병대대에서 9개 대대로 개편되었는데, 파스샹달에서의 피해가 영국군이 감당하기 힘들정도 였기 때문이었다. >"개전 후 처음으로 영국 육군은 낙관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내가 접했던 많은 병사들과 장교들 사이에서는 치명적인 우울증이 퍼지고 있었다."[br] -[[https://en.wikipedia.org/wiki/Philip_Gibbs|종군기자 필립 깁스(Philip Gibbs)]]- >"We have won great victories. When I look at the appalling casualty lists, I sometimes wish it had not been necessary to win so many."[br]우리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소름끼치는 사상자 명단을 볼 때마다 승리를 위한 많은 희생이 굳이 필요한가란 생각이 든다.[br]-전시내각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영국 정부의 경우 헤이그의 장담과 다르게 20만명의 병력이 헛되이 소모되고 헤이그를 제어하는데 실패했던 로이드 조지는 서부전선에 보내기로 한 70만의 대군 중 10만은 보내고 60만은 영국 본토에 남겨두는 초강수를 두었다.[* 헤이그는 파스샹달 전투 이후에도 총사령관직을 유지했지만 참모장 [[https://en.wikipedia.org/wiki/Launcelot_Kiggell|런슬롯 키겔]](Launcelot Kiggel, 1862 ~ 1954)과 정보참모 [[https://en.wikipedia.org/wiki/John_Charteris|존 차터리스]](John Charteris, 1877 ~ 1946)는 해임[* 정확히는 제1차 캉브레 전투 직후 무의미한 성과에 벼르고 벼른 로이드 조지의 보복성 조치로 해임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런슬롯 키겔은 파스샹달과 캉브레의 무의미한 성과로 인해 신경쇠약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되고 파스샹달 전투의 공세지속에 회의적이던 로이드 조지와 마찬가지로 공세에 회의적이던 육군대장 헨리 윌슨 경이 연합군 최고전쟁위원회 전쟁실행위원회 영국 대표 후보로 거론되자, 헤이그의 든든한 뒷배인 참모총장 로버트슨이 사임하고 1918년 2월 18일 헨리 윌슨(Sir Henry Hughes Wilson, 1864 ~ 1922)이 로버트슨 후임으로 대영제국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당연히 간단히 이길 줄 알았던 전투에서 인명경시에 가까운 막대한 피해에 영국사회는 솜 전투와 맞먹는 쇼크를 겪었다. 병력 파견 중단은 더 이상 영국 전역을 초상바다로 만들 수 없다는 방침이었다. 또한 독일군의 공세에 동맹인 이탈리아군이 --당연히--붕괴되어 이탈리아 전선 방면으로 영프 연합군이 병력을 보내는[* 파스샹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플러머가 5개 사단을 대동하고 17년 11월 이탈리아로 간다.] 등 1917년은 연합군에게 있어 힘든 한해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독일군도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동부전선의 러시아와의 접전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독일에겐 한숨을 돌렸지만, 순무의 겨울로 표현되는 독일군의 저열한 식량사정과 보급,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적국에 맞서 공세든 방어든 상대방과 엇비슷한 상태로 피해를 보는 독일군은 점점 병력의 수와 질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선전포고까지 겹치면서 전투 이후 독일군은 초기 정렬된 군기상태에서 해이된 상태로 전이되어 있었다. 독일의 문학가이자 당시 용기병 중대(Squadron)의 지휘관이던 루돌프 빈딩(Rudolp Georg Binding, 1867 ~ 1938)[* 참고로 루돌프 빈딩은 소설 "불멸 Unsterblichkeit(1922)"로 유명하며 그 외에도 히틀러의 지지자였다.]은 파스샹달 전투 이후 독일군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기가 낮거나 취약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명령을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병사들 때문에 연대가 일종의 망설임과 혼란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춘계 공세]] 당시 파리를 코앞에 두고 버려진 연합군 물자에 장병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결국 파리까지의 진출이 실패한다. 훗날 독일군 참모총장 간행물에는 1917년 플랑드르에서의 협상국의 공세로 인해 독일이 파괴될 위기(sicheren untergang)에 놓였다고 쓸 지경이었다. 연이은 공세로 사기와 전력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영국군이지만 아직 헤이그에게는 본토에서 보낸 따끈따끈한 10만 신병이 남아있었고 그때 당시엔 신무기였지만 애물단지였던 [[Mk 시리즈|탱크]]와 함께 동원하여 사상 최초의 전차 집중 운용 전투인 캉브레 전투를 치르게 된다.[* 참고로 이 쯤 되면 아군을 --포커 베팅하듯이-- 마구잡이로 날리는 이 헤이그에 대해서 비난도 하겠지만, 그는 전차 등 신무기를 거리낌 없이(고장 잘나는 애물단지인 전차가 독일군 야포에겐 좋은 먹잇감이지만 독일군 기관총엔 안 뚫린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확히는 헤이그 밑의 부하들 중 기병병과인 간부들이 탱크의 잠재성과 위력을 파악했다) 채용 및 활용할 줄 알았고 총류탄, 박격포의 근대화 및 본인 치통을 계기로 영국군에 치과를 두는 등 군 현대화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전후 헤이그 펀드로도 알려진 영국재향군인회를 조직하여 가난한 참전용사의 생활형편을 돌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적극적인 공세가 --비록 맨파워가 다른 국가에 비해 딸리는 영국군에게도 치명적이지만-- 독일군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안긴다는 것이다. 솜 전투나 아라스 전투, 지금의 파스샹달 전투, 앞으로 있을 100일 공세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장군은 자기 부하가 20만이 갈리든 60만이 갈리든, 눈에서 피눈물도 나오지 않는 '''강철멘탈'''의 소유자인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헤이그의 별명이 야전 전문가(Master of the Field)이면서 솜의 학살자(The Butcher of the Somme), 백정 헤이그("Butcher" Haig)였다.[* 근래에는 명장의 이미지 보다는 졸장의 이미지를 많이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출판한 일기장 내용과 2005년 발간된 헤이그의 일기장 원본이 왜곡수준으로 너무 차이났다는 것과 개인 명예를 위해 수십만의 불필요한 인명이 살상했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더욱 이미지가 나락으로 가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7jg19kp-Ro|순삭밀톡-결정적하루27]]]] 그리고 3개월의 기간 동안 영국 원정군 수십 만의 피를 흘리면서 전진한 8Km 구간은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에 도로 뺏기게 된다.--빽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